내 스물아홉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밖은 차가운 바람과 회색빛 하늘로 가득했지만, 내 안은 더 시리고 황량했다. 지나간 이별의 기억들이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기억들은 좋았던 순간이든, 아팠던 순간이든 나를 멋대로 조종하는 리모컨이 되어버렸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홀로 남겨지는 시간은 이별의 슬픔이 나를 가둬버리는 감옥과 같았다. 나는 그 감옥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거나, 분노에 휩싸여 과거의 상황들을 곱씹었다. 나의 시간은 과거의 감정 속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관계는 늘 나에게 어려운 숙제였다. 특히 친밀한 관계가 깊어질수록 불안정함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종종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집착하거나, 반대로 상대가 너무 다가오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릴 적 충분한 공감과 돌봄을 받지 못했던 기억, 혹은 그런 기분이 나를 지배했다. 마치 깊은 나무뿌리처럼 내 안의 애착 문제는 삶 전체, 심지어는 나 자신과의 관계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돌보는 법을 몰랐고,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원망과 분노 속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이 바로 '상처의 대물림'일까 두려웠다.
삶은 아픔과 고통, 행복과 즐거움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내 현실은 온통 아픔과 고통뿐인 것 같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울면서 누가 나를 도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이해해 주고 결이 맞는 사람들과의 소통, 따뜻한 만남이 절실했지만, 그런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점점 더 고독해졌고, 내면의 '내면 아이'는 상처투성이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처음에는 그 질문에 답하기조차 어려웠다. 내 감정은 너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실타래처럼 풀어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일기를 쓰거나, 조용히 앉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무언가를 상실한 이후라면 더욱 '적극적이고 객관적으로 나를 관찰'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아, 지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연습을 했다. 슬픔이 밀려올 때는 슬픔을 느끼는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그저 "슬프구나, 힘들었구나"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는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그 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마치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를 돌보는 과정과 같았다.
치유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때로는 감정의 파도에 다시 휩쓸려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마음을 이해하는 연습, 삶을 사랑하는 연습'을 계속했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평생을 원망과 분노 속에 살지 않기 위해, '상처의 대물림을 끊어내고 안정된 애착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찾는 과정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믿음을 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연습을 했다.
내면이 조금씩 단단해지자,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상처받기 쉬웠지만, 이제는 '자신의 처지가 있듯이 상대방의 입장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다른 관점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을 '배경이 되어 빛나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체감했다.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과 내면의 목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이 되기 위해 유연한 사고를 하려고 애썼다.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났다. 과거에는 불안정한 애착 때문에 관계에 매달리거나 회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존중하고 '믿음을 기초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힘들 때는 혼자 끙끙 앓기보다는 '좋은 사람들과의 소통', '결이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희망'을 얻었다. 나를 지지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진정한 관계 속에서 오는 따뜻한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떠한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묻는 것은 이제 불안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미소 짓는 일들이 내 삶에 조금씩 늘어났다.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고, 건강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내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이전처럼 감정에 압도되어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삶의 나침반'을 따라 나아가려는 의지가 강해졌다. '나는 지금의 위치에서 행복한가?', '나는 몰입하며 즐겁게 지내는 시간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이 질문 중 하나에라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만들어갔다.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속에서 '몰입하며 즐겁게 지내는 시간'을 발견했다. 그 시간들은 내게 '행복과 몰입이라는 보상'을 주었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아름다운 삶의 일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삶에는 '아픔과 고통'이 존재한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고, 과거의 상처가 문득 고개를 들 때도 있다. 돈이나 명예가 주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길을 잃었다고 가만히 서서, 언제까지나 울면서 누가 도와주기만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를 이해하고 돌보는 법을 배웠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게 되었다. 내 안의 '안정된 애착'을 통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감정에 '리모컨'을 빼앗기지 않는다.
나의 스물아홉 겨울은 끝났고, 이제는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슬픔의 비가 내리면 잠시 젖기도 하지만, 그 비를 피할 줄도 알고 비가 그친 뒤의 무지개를 기다릴 줄도 안다. 화창한 날에는 햇살 아래서 마음껏 웃고 즐기며 '삶을 즐기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에게 묶여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나를 관찰하며 삶의 나침반을 따라가고' 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미소 짓는 일들이 가득한' 삶, 내 마음의 계절을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삶을 향해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안의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임을 믿는다.